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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성인과 못 깨달은 범부는 어떻게 다른가

아이유 IU 2009. 8. 22. 15:01

 깨달은 성인과 못 깨달은 범부는 어떻게 다른가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을 생사의 그물과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전도선언에 나오는 ‘나는 이미 세상과 인천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이미 세상과 인천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다.’는 말이 좋은 예다.

 

‘인천(人天)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일체의 속박 즉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貪瞋癡)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음의 경전이 그것을 설명해준다.


"사리풋타여,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네.

당신의 스승은 자주 열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도대체 열반이라는 것은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인가."

"친구여, 열반이란 것은 탐욕이 영원히 다하고, 분노가 영원히 다하고, 어리석음이 영원히 다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네.(貪慾永盡 瞋恚永盡 愚癡永盡 是名涅槃)"

"그러면 우리가 그 열반을 얻고자 하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그것은 간단하네. 어떤 사람이든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을 닦으면 되네


그렇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석연치 못한 데가 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들이 탐진치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그것이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부처님도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추운 곳에 가면 춥다.

병들어 늙고 죽는 일은 물론이고 식욕과 성욕, 수면욕 등의 생물학적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열반을 얻지 못한 사람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이에 대해 부처님은 한 경전에서 참으로 명쾌한 설명을 하고 있다.


"어리석고 무식한 중생은 감각기관으로 어떤 대상을 접촉하면 괴롭다는 느낌, 즐겁다는 느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을 갖는다. 지혜롭고 많이 아는 거룩한 성자도 감각기관으로 어떤 대상을 접촉하면 그와 같은 느낌을 갖는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중생과 지혜로운 성자와의 차이는 무엇이겠는가?

어리석은 중생은 감각기관으로 어떤 대상을 접촉하면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을 갖는다. 이들은 곧 근심하고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고 원망하고 울부짖느니라. 이는 그 느낌에 집착하고 얽매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첫 번째 화살을 맞은 뒤에 다시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나 지혜롭고 거룩한 성자는 감각기관으로 어떤 대상을 접촉하더라도 근심과 슬픔과 원망과 울부짖음과 같은 증세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때는 몸의 느낌만 생길 뿐, 생각의 느낌은 생기지 않는다. 이는 그 느낌에 집착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첫 번째 화살을 맞았으나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 것과 같으리라.”


 

요약하면 깨달은 사람도 결코 생물학적 또는 물리적 현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한 반응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 대상을 만난다.

이때 어리석은 사람은 ‘좋다(樂)’거나 ‘싫다(苦)’거나 ‘그저 그렇다(不苦不樂)’는 반응을 나타낸다.

이것 때문에 탐진치(貪瞋癡) 삼독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비해 깨달은 사람은 그런 분별에 빠져 탐진치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처님이나 아라한과 같은 성자도 굶으면 배가 고프고 맞으면 아프다.

그러나 성자는 이로 인해 분노나 원망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집착이 끊어져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 평화로운 마음상태가 곧 열반이다.

 

분노와 원망이 없으면 나쁜 행위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시는 그 결과인 윤회를 하지 않고 해탈을 얻게 된다.

 

불교의 수행은 바로 이러한 상태가 되기 위해 하는 것이다.

 

 

탐진치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열반의 문제와 결부해 생각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열반은 탐욕과 분노와 우치가 영원히 소멸된 참다운 마음이 평화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수행자가 수행을 해서 진정으로 깨달음과 열반을 성취했다면 탐진치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매사에 탐진치에 의해 행동하는 것은 아직 깨달음도 열반도 얻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그런 점에서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의 삶의 태도가 어떠한지는 큰 주목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깨달은 사람은 인과의 법칙에서도 자유로운가 ?

 

이와 관련해 생각나는 이야기는 백장야호(百丈野狐)의 설화다.

백장청규로 유명한 백장선사가 설법을 할 때면 늘 어떤 노인이 와서 설법을 들었다.

그는 과거 백장산에 살던 고승이었는데 어떤 학인이 찾아와 ‘수행을 잘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지느냐?’고 묻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대답이 잘못돼 5백 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백장선사는 노인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게하고, ‘인과에 어둡지 않다(不昧因果)’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의 여우의 몸을 벗고 해탈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설화적 구조로 되어있지만 수행자의 행동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암시를 준다.

 

진정으로 수행을 잘한 사람이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알고 그런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음주식육(飮酒食肉)이나 행도행음(行盜行淫)이 무방반야(無妨般若)라는 식의 분수에 넘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깨달음에 대한 오해를 없애는 길


 

첫째는 깨달음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특별히 신비한 무엇이 아니라 평범하다시피 한 상식인 관계성의 원리(緣起)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 원리를 파악하고 우주와 세계와 인생을 설명했다.

즉 모든 것은 인연관계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그 인연이 사라지면 변하고 만다.

 

모든 존재는 무상의 법칙에 지배를 받으며, 따라서 실체적 자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바로 알아채야 한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러한 깨달음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면

구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수많은 아라한은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깨달은 내용은 부처님이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다만 부처님은 먼저 깨달은 분이라는 점에서 스승, 그 가르침을 받아 나중에 깨달은 분은 제자가 된 것뿐이다.

 

셋째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특별히 놀라운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팔정도를 제대로 닦으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이미 부처님이 깨달아놓았다.

우리는 그분이 깨달은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고, 부처님이 제시한 길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별하게 새로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넷째는 깨달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흔히 깨달은 사람은 생물학적 또는 도덕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오해다.

부처님에 의하면 성자와 범부의 차이는 똑같은 사실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갈라 진다고 한다.

즉 외부적 환경에 접촉할 때 탐진치 삼독을 일으키면 범부, 거기에서 벗어나는 존재는 성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나라 불교가 생각하는 깨달음과 수행관을 보면 안타깝게도 과녁을 잘못 겨냥하고 있다는 느낌이 짙다.

지금까지 우리는 깨달음의 문제를 너무 신비한 무엇, 고답적인 무엇으로 생각하고 토론을 기피해왔다.

이것이 깨달음에 대한 오해를 증폭시킨 원인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다양하고 진지한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돼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평생을 수행하고도 헛공부를 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